영국과 일본은 왜 지금 국민에게 ’72시간’을 말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 영국과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사흘 버틸 준비를 하라”고 당부한 것은 전쟁이 코앞이라는 신호가 아니다. “큰일이 나면 나라가 당신 집 문 앞에 닿기까지 최소 사흘은 걸린다”는 정부의 솔직한 고백이다.

지난 10월 22일, 영국 내각부는 ‘비 레디(Be Ready)’ 캠페인을 시작했다. 모든 가정이 최소 72시간을 스스로 버틸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권고 목록은 소박하다. 1인당 하루 3리터씩 사흘치 물 9리터, 조리 없이 먹을 수 있는 사흘치 식량, 현금, 담요, 구급상자, 여분 배터리를 챙긴 손전등, 태엽식 라디오. 정부는 이것이 3개년 계획의 첫 단계라고 밝혔다.

반응은 빨랐다. 영국 냉동식품 체인 아이슬란드는 며칠 새 통조림 판매가 40% 늘었다고 했고, 가전 유통업체 메이플린은 발표 후 사흘 만에 손전등 판매가 거의 4배, 라디오는 2배 가까이 뛰었다고 전했다. 온라인 마트에서는 생수 몇 종류가 품절됐다.

일본도 뒤따른다. 호소노 고시 방재담당상은 “최소 3일분, 가능하면 1주일분의 식량과 물, 화장실 용품을 집에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정부는 새 방재청 출범에 맞춰 12월 2일쯤 이 요청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염두에 둔 것은 난카이 해곡 대지진, 수도권 직하 지진, 후지산 분화 같은 초대형 재난이다.

이들 국가가 말한 숫자에는 경험이 담겨 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어떤 지역은 재해 사흘째가 지나서야 식량을 구할 수 있었고, 전기 복구에 일주일 이상, 수도 복구에 열흘 이상 걸린 곳도 있었다. 도로가 끊기고 통신이 멎으면 구조대와 구호물자가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결국 각 가정이다.

영국이 꼽은 위협은 조금 다르다. 폭풍과 홍수, 가뭄 같은 날씨 문제에 더해 사이버 공격과 적대국의 위협으로 전력망·통신망이 멈출 가능성까지 넣었다. 실제로 올해 1월 폭풍 ‘고레티’로 수만 가구가 정전을 겪었다. 지진이 걱정인 일본과 ‘전기가 끊긴 도시’가 걱정인 영국. 위험은 달라도 답은 같았다. 72시간이다.

  • 국가별 ‘버티기’ 권고

재난이 잦은 일본이라면 준비가 잘돼 있을 것 같지만, 숫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조사해 보니 1인 하루 3리터 기준으로 사흘치 물을 갖춘 사람은 약 70%였다. 그런데 휴대용 비상 화장실을 갖춘 사람은 27.5%에 그쳤다. 2024년 노토반도 지진 때 가장 먼저 부족했던 것이 바로 화장실이었다. 일본 정부가 이번 요청에 ‘화장실 용품’을 굳이 집어넣은 이유다.

영국은 더하다. 2024년 정부가 비슷한 캠페인을 처음 열 때 나온 조사에서 집에 비상용품 키트를 둔 사람은 15%에 불과했다. 이번 마트 품절 사태는 어쩌면 그 85%가 한꺼번에 움직인 결과일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어둘 것이 있다. 흔히 ‘생존가방’이라 부르지만, 사실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집을 떠나야 할 때 들고 뛰는 대피용 가방이고, 다른 하나는 집에 머물며 버틸 때 쓰는 집 비축분이다. 우리 국민재난안전포털이 대피용 가방은 2~3일분, 장기 대비는 30일분으로 나눠 안내하는 것도 그래서다. 둘을 한 가방에 몰아넣으면 들 수가 없다. 4인 가족 사흘치 물만 36리터, 무게로 36킬로그램이다. 가방은 가볍고 빠르게, 비축은 넉넉하고 꾸준하게. 이것이 기본 설계다. 서울 강동구청 안내처럼 대피용 가방은 가족 수대로 현관처럼 들고 나가기 쉬운 곳에 두는 게 좋다.

생존가방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022년 봄 울진·삼척 산불 때 많은 주민이 한밤중에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30일치 비축 창고가 아니라 현관에서 3초 만에 집어 들 가방 하나였다. 동해안은 산불에 지진해일 위험, 폭설로 길이 끊기는 일까지 겪는 곳이다. 영국의 ‘정전’과 일본의 ‘지진’이 이 땅에서는 ‘산불’과 ‘고립’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영국 정부가 덧붙인 말이 마음에 남는다. 한꺼번에 사지 말고, 평소 장 볼 때 하나씩 더 담으라는 것.
일본은 이를 ‘롤링 스톡’이라 부른다. 평소 먹는 것을 조금 넉넉히 사두고, 먼저 산 것부터 먹고, 먹은 만큼 다시 채우는 방식이다. 비상식량이 창고에서 유통기한을 넘기는 일도 없다.

가방 하나가 재난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재난이 닥친 뒤 첫 사흘을 ‘공포의 시간’에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으로 바꿔준다. 영국과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건넨 것은 겁이 아니라 그 사흘이다. 현관 앞 가방 하나의 무게는 결국 생존을 위한 마음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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